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21 화

독이 든 성배를 쥔 여인, 마침내 별자리가 완성되다

10만 명의 고객이 동시다발적으로 참여한 AR 쇼케이스는 IT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성공이었다.

다음 날, 전 세계 언론은 ‘프로젝트 NOD’의 혁신성을 대서특필했고, 황 전무가 주도했던 ‘K-테크 혁신 연합’은 주가 폭락과 함께 내부 분열로 완전히 공중분해 되었다.

“팀장님! 사전 예약 대기자만 벌써 500만 명 돌파했습니다!”

미래기획팀 사무실은 그야말로 축제의 도가니였다. 오 과장, 권 책임, 최 대리 할 것 없이 모두가 부둥켜안고 환호했다.

하지만 나는 내 모니터 한구석에 띄워진 짧은 칼럼의 예고편을 보며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 “기술이 인간을 완벽하게 대리(Agentic)하는 시대. 우리는 편리라는 마약에 취해, 결국 ‘사유(思惟)‘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거세당할 것이다.” - 무영(無影) ]

‘무영’.

국내, 아니 글로벌 IT 업계에서 가장 신비롭고 파괴적인 영향력을 가진 익명의 테크 철학자 겸 칼럼니스트. 2년 전, 글로벌 빅테크 기업 M사가 10조 원을 투자한 메타버스 프로젝트를 전면 백지화시킨 것도 그녀의 칼럼 단 한 편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는 기술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인간 철학의 부재’를 서늘하게 도려냈고, 그 글은 전 세계 지식인들을 뒤흔들며 시장의 패러다임을 통째로 바꿔놓았었다.

그녀가 내일 자정, 우리 프로젝트 NOD의 철학적 빈곤함을 까발리는 전면적인 비판 칼럼을 게재하겠다고 예고한 상태였다.

“이 여자, 황 전무가 남겨둔 마지막 끄나풀 아닐까요?” 강한결 변호사(옥춘무사)가 팔짱을 낀 채 서늘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녀의 예고편 문장에는… 맹목적인 비난이 아니라, 진짜 깊은 곳을 찌르는 칼날 같은 무게감이 있습니다.” 통찰력의 샘물, 이지윤 사원(옥춘청수)이 조용히 대답했다.

만약 이대로 그녀의 칼럼이 게재된다면, 지금의 미친듯한 환호는 순식간에 ‘인간성을 파괴하는 괴물 기기’라는 윤리적 비난으로 뒤집힐 수 있었다. 기기는 완벽했지만, 그 기기가 세상에 던질 철학적 충격에 대한 ‘안전장치’가 우리에겐 없었다.

나는 최 대리(옥춘화광)를 통해 ‘무영’의 IP를 역추적했다. 그녀의 은신처는 화려한 도심이나 최첨단 연구소가 아니라, 서울 외곽 북한산 자락에 숨겨진 오래된 한옥 도서관이었다.

나는 홀로 그곳을 찾아갔다. 도서관 깊은 곳, 대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달밤의 마루에 단정한 개량 한복 차림의 한 여인이 정좌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낡은 구형 타자기와 함께, 먹을 듬뿍 머금은 붓과 화선지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는 순간.

내 시야가 눈이 멀 듯 하얗게 점멸하며, 이제껏 본 적 없는 가장 기이하고 경이로운 신화적 환영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어두운 밤, 세상을 향해 가장 거칠고 예리하게 포효하는 거대한 야수(상관)의 기운이 날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짐승의 목에는, 수천 년의 지혜와 학문이 담긴 묵직하고 고결한 족쇄(정인)가 채워져 있었다.

야수는 족쇄를 끊으려 발버둥 치는 대신, 그 무거운 족쇄 안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서늘한 한 편의 시(詩)를 토해내고 있었다.

‘상관패인(傷官佩印).’

가장 강한 자기 표현과 비판의 별인 상관(傷官)이, 깊은 학문과 자기 통제의 별인 정인(正印)을 기꺼이 차고 있는 경이로운 팔자. 단순히 자유분방하게 날뛰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깊이 있는 사색을 거친 완벽하게 절제된 자유. 상관이 거칠수록 그녀의 작품성은 강해졌고, 정인이 두텁게 받쳐주기에 그녀의 비판은 후대에 남을 압도적인 무게를 가졌다.

자유로운 영혼의 시인, 하늘이 내린 15별의 마지막 조각. ‘옥춘시객(玉春詩客)‘이었다.

“칼럼니스트 무영 님이시군요. 서도진입니다.”

먼 곳을 응시하며 깊은 사색의 눈을 빛내던 그녀가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잘나가던 대기업 팀장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시다니. 제 칼럼을 돈이나 권력으로 막으러 오셨습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운 겨울 냇물처럼 맑고 날카로웠다.

“막으러 온 게 아니라, 선생님의 그 깊은 사색을 들으러 왔습니다. 당신이 보기에 우리 기기에 부족한 점이 무엇입니까?”

무영이 헛웃음을 쳤다.

“당신들이 만든 시스템은 모든 것을 인간 대신 판단하고 실행해 주죠. 편안할 겁니다. 하지만 그 완벽함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멍청하게 만듭니다. 기계가 알아서 결제하고, 스케줄을 짜고, 결정을 내려주면, 인간은 결국 사색할 시간을 잃고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할 겁니다. 당신들의 기기에는 기술의 폭주를 막을 ‘윤리적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그녀의 비판은 거칠었지만, 동시에 소름 돋도록 정확했다.

“틀 안에서 자유로워야 진짜 자유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옥춘시객의 본질을 꿰뚫는 한 마디에, 무영의 서늘했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기술이 거칠게 폭주하면 인간성은 파멸합니다. 그것을 통제할 묵직한 윤리와 철학의 틀(정인)이 필요하죠.” 나는 내 가슴 속 옥춘반석(玉春盤石)의 에너지를 묵직하게 끌어올렸다.

“그래서 제안하러 왔습니다. 선생님의 그 예리한 붓과 종이. 밖에서 세상을 비판하는 데만 쓰지 마시고, 우리 시스템의 심장부로 직접 들어와 ‘윤리 알고리즘 코어’를 짜주십시오.”

나의 제안에 무영은 들고 있던 붓을 벼루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방금 전까지 고요하던 그녀의 머리 위에서, 예리하고 반항적인 상관(傷官)의 야수성이 맹렬하게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

무영이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날 밖에서 떠드는 비평가로 남겨두지 않고, 아예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여 입을 막으시겠다? 얄팍한 수작이군요, 서 팀장님. 제가 아무리 훌륭한 윤리 코어를 짠다 한들, 결국 당신네 경영진의 이익에 반하면 언제든 스위치를 끄고 덮어버릴 텐데, 제가 왜 그런 뻔한 쇼의 들러리를 서야 하죠?”

자유로운 영혼의 시인은 권력에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철저히 불신하고 있었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시스템의 가장 깊은 곳. 우리 디바이스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는 ‘마스터 킬 스위치(Kill Switch)’ 전권을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뭐라고?”

처음으로 무영의 서늘했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말 그대로입니다. 저희 기기가 사용자의 인간성을 침해하거나, 윤리적 임계점을 넘었다고 판단되는 순간. 사장이나 저의 승인 없이도, 선생님이 직접 메인 서버를 셧다운 시킬 수 있는 절대 권한입니다. 당신이 우리의 재판관이 되어달라는 뜻입니다.”

바람이 불어 대나무 잎사귀가 거칠게 스치는 소리만 마루를 맴돌았다.

무영은 내 눈을 꿰뚫어 볼 듯 집요하게 응시했다.

“제정신입니까? 수백, 수천억이 걸린 당신들의 목줄을, 방금 처음 만난 글쟁이 하나에게 쥐여주겠다고요? 이건 제게 ‘독이 든 성배’를 마시라는 게 아니라, 당신들 스스로 목에 칼을 들이밀고 제게 손잡이를 쥐여주는 꼴입니다.”

“그 독마저 달게 마시겠습니다.” 나는 내 안의 가색지성(稼穡之性)을 끌어올려 단호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의 그 깊은 학문과 절제(정인)가 뼈대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술(상관)은 결국 세상을 망치는 고철로 전락할 겁니다. 당신이 없으면 우리의 생태계는 미완성입니다.”

나의 벼랑 끝 결단에, 무영의 머리 위에서 으르렁거리던 거친 비판(상관)의 기운이 마침내 수천 년의 지혜(정인)와 얽혀들며 하나의 거대한 빛줄기로 융합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천천히 마루에서 일어섰다. 밤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 사이로 그녀의 안광이 날카롭게 빛났다.

“서도진 팀장.”

무영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이 긁어모은 그 압도적인 기술과 인재들. 제아무리 화려해도, 누군가 철학이라는 선을 긋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저 맹렬하게 폭주하다 타버릴 고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좋습니다. 당신들의 그 잘난 쇳덩어리에 족쇄를 채워보도록 하죠.”

그녀가 드디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대쪽 같은 기상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만약 당신들의 혁신이 오만함에 취해 내가 정한 선을 넘는 날엔… 당신의 심장부에 꽂아둔 나의 붓이, 가장 먼저 당신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겁니다.”

그녀의 서늘한 경고를 듣는 순간.

내 눈앞의 시야가 다시 한번 거대하게 확장되었다.

무영의 말이 맞다. 내가 모은 14개의 거친 별빛은, 자칫 오만함에 취해 어지럽게 쏟아지다 타버릴 유성우(流星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시인(옥춘시객)이 시스템의 중심에 앉아, 먹을 갈아 그 빛들 사이에 선을 긋고 묵직한 윤리적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이다. 그녀의 서늘한 붓끝(정인)이 거친 혁신(상관)을 다스릴 때, 비로소 우리의 기술은 후대까지 살아남는 진정한 별자리로 완성될 터였다.

반석, 거목, 대감, 청림, 청수, 화광, 검객, 부자, 장수, 선비, 무사, 선인, 예인, 인덕.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15번째 별, 옥춘시객(玉春詩客)까지.

열다섯 개의 별빛이 완벽하게 얽혀들며, 세상을 떠받칠 거대한 우주목(宇宙木)의 15개 가지가 하나로 찬란하게 이어지는 환영이 내 머릿속에 아득하게 펼쳐졌다.

마침내, 거대한 별자리를 엮어낼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런칭 기기 1차 발송까지 남은 시간은 단 48시간.

우리의 완전무결한 생태계가 궤도에 오른 것을 직감한 듯, 사방에 흩어져 있던 무명(無名)의 찌꺼기들이 생존을 위한 최후의 발악을 위해 하나로 뭉치며 서울 상공을 검게 덮어오고 있었다.

모든 것을 건 진짜 전쟁의 최종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