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19 화
억지 영업은 필요 없다, 매혹하는 창작자 옥춘예인(玉春藝人)
이틀 뒤, 새벽 3시. 회사 지하 4층 주차장.
인적 없는 어두운 구석에 검은색 탑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와 섰다.
“물건 내리쇼.” 낡은 야상을 입은 백 차장(옥춘풍운)이 씩 웃으며 탑차 뒷문을 열어젖혔다. 사규와 절차를 박살 내고 자유 무역항의 블랙마켓 루트를 뚫어버린 그의 미친 능력 덕분에, 최 본부장이 막아섰던 ‘초소형 NPU 칩셋’ 10만 개가 단 이틀 만에 우리 손에 떨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차장님.”
나와 미래기획팀 팀원들은 서둘러 상자들을 부서 전용 보안 창고로 옮겼다.
다음 날 아침.
결합된 최종 시제품의 성능은 경이로웠다. 권 책임(옥춘검객)의 서늘한 코드와 오 과장(옥춘거목)의 철통같은 보안망 위에서, 디바이스는 주변의 모든 스마트 기기를 완벽하게 통제하며 날아다녔다.
하지만, 회의실 스크린에 띄워진 ‘런칭 쇼케이스 기획안’과 ‘기본 UI 디자인’을 보는 내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내 질문에, 기존 마케팅팀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회사 표준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적용한 UI입니다. 그리고 쇼케이스는 늘 하던 대로, 사장님 기조연설 후에 스펙(Spec)을 나열하는 프레젠테이션으로 기획했습니다. 가장 안전하고 정석적인…”
“쓰레기군요.”
내 직설적인 독설에 회의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 기기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경험’을 파는 물건입니다. 그런데 스펙 나열에, 이 딱딱하고 재미없는 인터페이스? 소비자가 바보입니까? 이런 차가운 고철 덩어리로는 절대 시장의 판도를 뒤집지 못합니다.”
기기가 아무리 뛰어나도, 사람의 마음을 매혹하지 못하면 그저 성능 좋은 기계일 뿐이다. 억지로 영업하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서 만든 것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절대적인 ‘매력’이 필요했다.
나는 회의실을 박차고 나와 디자인 부서 쪽으로 향했다.
최 본부장의 입김이 닿는 마케팅팀의 낡은 룰 따위는 모조리 무시하고, 내 방식대로 새로운 별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디자인 부서의 가장 구석진 파티션.
그곳에는 회사 표준 폰트와 로고 사이즈를 맞추는 단순 업무만 반복하며, 하루 종일 한숨을 쉬는 3년 차 유아진 대리가 있었다. 그녀는 회의 때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냈지만, 임원들에게 ‘기업 이미지에 안 맞게 너무 가볍고 장난스럽다’며 번번이 묵살당해 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니터에는 몰래 작업 중인 기하학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3D 모션 그래픽이 부드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는 순간. 내 시야가 눈부시게 밝아지며 그녀의 정수리 위로 경이로운 환영이 펼쳐졌다. 화려한 부채와 두꺼운 책. 부드럽고 따뜻한 봄 햇살 아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메마른 가지에 꽃이 피어나듯 풍요로운 생명력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어김없는 직감의 공명.
‘식신생재(食神生財).’
식신(食神)은 자기를 표현하고 만들어내는 별이고, 재성(財星)은 그 결과물이 가치로 변환되는 별이다. 식신이 재성을 생함으로써, 자신의 재능과 표현이 자연스럽게 막대한 풍요로 이어지는 창조의 팔자. 재능과 매력을 통해 부와 인기를 함께 얻는 완벽한 창작자형, 바로 ‘옥춘예인(玉春藝人)‘이었다.
“유아진 대리.”
“힉! 서, 서 팀장님! 이건 그게 아니라 잠깐 머리 좀 식히려고…”
그녀가 당황하며 작업 중이던 그래픽 창을 황급히 닫으려 했다.
“닫지 마십시오.”
나는 그녀의 마우스를 쥔 손을 가볍게 제지했다.
“부채는 표현의 도구입니다. 한 번 펼치면 풍경이 되고 흔들면 바람이 되죠. 하지만 그 바람을 낡은 캐비닛 안에 가둬두면 썩어버릴 뿐입니다.”
내 말에 유 대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유 대리. 우리 디바이스의 메인 UI 디자인과, 다음 주에 있을 전 세계 생중계 쇼케이스의 총괄 디렉팅. 당신이 맡아주십시오.”
“네?! 제가요? 하지만 저는 회사 표준 가이드라인도 잘 못 맞추는 데다가, 임원분들이 제 디자인은 너무 튀어서…”
“그놈의 낡은 가이드라인은 쓰레기통에 처넣으세요.”
나는 그녀의 모니터를 똑바로 가리켰다.
“억지로 무언가를 팔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가장 즐거운 것, 당신이 보기에 미치도록 매력적인 것을 만드세요. 손길 닿는 곳마다 풍요가 피어나도록.”
나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유 대리의 머리 위를 짓누르던 답답한 회사 규격의 그림자들이 펑! 하고 흩어졌다. 숨겨져 있던 옥춘예인의 맑고 따뜻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식신(표현)이 재성(가치)으로 거침없이 뻗어 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주눅 들어 있던 3년 차 평사원의 눈이 아니라, 세상을 자신의 캔버스로 삼으려는 거만한 천재 예술가의 안광.
“팀장님. 진짜 제 마음대로 다 엎어버려도 뒷감당해주실 겁니까?”
“당연하죠. 당신의 그 부채로 낡은 판을 싹 다 쓸어버리십시오.”
불과 사흘 뒤.
유아진 대리가 회의실 스크린에 띄운 쇼케이스 기획안과 기기 UI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기존의 딱딱한 폴더형 인터페이스는 사라지고, 사용자의 음성과 제스처에 따라 물 흐르듯 반응하는 유기적인 그래픽이 생물처럼 살아 숨 쉬었다.
쇼케이스 기획 역시 사장의 지루한 연설을 모조리 빼버리고, 홀로그램과 관객 참여형 무대를 결합한 마치 한 편의 거대한 마술쇼 같았다.
“미쳤어… 이건 그냥 전자기기가 아니라 예술품이잖아요.”
디자인에 깐깐하던 권 책임조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옥춘예인의 재능은 억지로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좋아서 손에 잡히는 것을 만들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대중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가 무서운 매력과 풍요를 창출해 내는 진짜 예술.
이제 기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그리고 대중을 홀릴 매혹적인 포장지(예인)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15별 중 12개의 별이 모였다.
우리는 완벽한 진형을 갖추고 디데이(D-Day)를 기다렸다.
하지만, 런칭 쇼케이스를 단 하루 앞둔 저녁.
사장실에서 급박한 호출이 떨어졌다. 이 사장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굳어있었다.
[서 팀장. 당장 내 방으로 올라오게. …쇼케이스 대관장이 방금 전면 봉쇄됐어. 황 전무 그 미친놈이, 밖에서 기어코 일을 냈군.]
내 발등에 떨어졌던 시커먼 무명의 진흙.
놈이 마지막 발악을 위해, 우리의 가장 찬란한 무대를 잿더미로 만들 거대한 화마(火魔)를 몰고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