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13 화

낡은 규정집을 찢고 나온 완벽한 선비

오 과장이 겹겹이 쳐둔 보안의 성벽 덕분에, 주말 내내 미래기획팀 사무실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월요일 오전 10시. 그 고요함은 전투화를 신은 듯한 구두 발소리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전원 키보드에서 손 떼십시오. 지금부터 미래기획팀에 대한 특별 감사를 시작합니다.”

검은 정장을 빼입은 감사팀 직원 다섯 명이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들의 선두에는 황 전무의 충견으로 악명 높은 감사팀장, 구 상무가 서 있었다.

“서도진 팀장. 사내 보안망 무단 우회, 미인가 API 사용, 그리고 타 부서 데이터 무단 열람 혐의입니다. 지금 이 시간부로 ‘프로젝트 NOD’는 전면 중단되며, 관련 서버와 PC는 감사팀에서 압수합니다.”

구 상무가 영장이라도 되는 양, 황 전무의 직인이 찍힌 공문을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팀원들이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술로 찍어 누를 수 없으니, 아예 사규라는 칼을 휘둘러 판 자체를 엎어버리려는 황 전무의 비열한 수작이었다.

“서버실 전원 내리고, 하드디스크 전부 분리해.”

구 상무의 지시에 감사팀 직원들이 권 책임과 오 과장의 자리로 우르르 몰려갔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이쿠. 과연 뽑힐까 모르겠네요.”

“뭐?”

감사팀 직원이 오 과장의 PC에 마스터 키 USB를 꽂고 데이터 추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화면에는 시뻘건 경고창만 뜰 뿐, 단 1KB의 데이터도 복사되지 않았다.

“상무님… 이거, 접근이 아예 안 됩니다. 사내 마스터 권한으로도 방화벽이 안 뚫립니다!”

“뭐야? 비켜봐!”

구 상무가 직접 키보드를 두드렸지만 결과는 같았다.

구석에 앉아 있던 오 과장(옥춘암석)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특유의 느릿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거 제가 256비트 동적 암호화로 묶어놨습니다. 외부에서 강제로 빼내려고 시도하면 소스 코드가 스스로 깨져버리게 락(Lock)을 걸어뒀죠. 전무님 할아버지가 와도 못 뺍니다.”

태산처럼 굳건한 오 과장의 성벽이 완벽하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 자식들이 진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구 상무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좋아. 데이터는 묶어놔라 이거지? 그럼 물리적으로 봉쇄하면 그만이야. 지금 당장 미래기획팀 전원 직무 정지시키고, 이 사무실 폐쇄해! 너희들 다 징계위원회에 회부해서 모가지 날려줄 테니까!”

기술적 탈취가 막히자, 아예 인사권과 사규를 무기 삼아 팀 전체를 마비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오 과장의 방패는 데이터를 지킬 수는 있지만, 사람을 자르는 인사 권력까지 막아낼 수는 없었다.

감사팀 직원들이 노란색 통제선을 들고 사무실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폭력적인 권력의 횡포. 황 전무의 거대한 그림자가 구 상무의 등 뒤에 올라타, 우리 팀원들의 목을 조르며 조롱하고 있었다.

“서 팀장. 이래도 네 알량한 기술이 회사의 룰(Rule)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사면초가.

이 억지스러운 룰을 깨부수려면, 그들보다 더 날카롭고 완벽한 룰(법)의 검을 쥐어야 한다.

나는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이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 덜덜 떨고 있는 팀원들 사이로, 유독 안절부절못하며 캐비닛 앞을 서성이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부서의 서무와 행정을 담당하는 정 대리.

그는 평소 팀원들이 영수증에 풀칠을 잘못하거나 규정을 1mm라도 어기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잔소리를 퍼붓던 융통성 제로의 인간이었다. 다들 그를 ‘꽉 막힌 꼰대’라며 피했지만, 지금 내 눈에는 그의 정수리 위에서 요동치는 기묘한 빛이 보였다.

그의 머리 위에는 ‘정갈한 붓과 두꺼운 서책’의 형상이, 무거운 먼지와 낡은 영수증 뭉치(그림자)들에 짓눌려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김없이 서늘한 직감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관인상생(官印相生).’

관성이 인성을 생하여, 엄격한 규율 안에서 지혜를 키우는 팔자. 그의 깐깐함은 그저 아랫사람을 괴롭히려는 꼰대질이 아니었다. 비뚤어진 잣대를 바로잡고, 그 완벽한 규칙 위에서 학문을 세우고자 하는 ‘옥춘선비(玉春先輩)‘의 고귀한 본성이었다.

그 기운이 고작 부서 영수증이나 검사하는 데 쓰이고 있으니, 훌륭한 학문이 책 안에 갇혀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노란색 통제선을 뜯어내며 정 대리 앞으로 걸어갔다.

“정 대리.”

“티, 팀장님. 어쩌죠? 저 사람들이 지금 사규 제14조 2항을 근거로 직무 정지를 때리려고 하는데…”

“정 대리. 너 우리 회사 사규랑 근로기준법, 감사 규정 다 외우고 있지?”

“네? 네… 뭐, 행정 업무만 5년 차니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외우긴 합니다만…”

나는 정 대리의 어깨를 홱 잡아 돌려 구 상무 쪽을 마주 보게 했다.

“그럼 저 무식한 놈들이 지금 무슨 법을 어기고 있는지, 네가 똑똑히 가르쳐 줘.”

“예…? 제가요? 저분은 감사팀 상무님이신데…”

“저들은 규정을 집행하러 온 게 아니야. 규정을 무기 삼아 권력을 휘두르는 사기꾼들이지.”

나는 상체를 훅 숙여 정 대리의 귓가에 낮고 묵직하게 속삭였다.

“읽은 것을 사람으로 옮겨라. 그게 진짜 배움이다. 네 머릿속에 든 그 완벽한 규율과 지식, 고작 영수증 검사하는 데 쓰지 말고 진짜 법이 뭔지 저 가짜들에게 집행해버려. 넌 일개 서무가 아니라, 이 부서를 지혜와 원칙으로 이끄는 완벽한 선비니까.”

그 순간. 정 대리의 머리 위를 짓누르던 낡은 영수증과 규정집의 그림자들이 펑! 하고 터져나갔다.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붓과 서책이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며 솟아올랐다. 학문이 빛이 되어 세상을 베어버리는 관인상생의 칼날이 드디어 진짜 전장을 만나 각성한 것이다.

정 대리의 구부정했던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늘 불안하게 흔들리던 그의 동공이, 마치 천 권의 책을 통달한 대학자처럼 차갑고 예리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구 상무가 들고 있던 노란색 통제선을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구 상무님. 지금 명백한 월권 및 불법 감사를 자행하고 계십니다.”

정 대리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평소의 찌질한 톤이 아니었다. 송곳처럼 차갑고 또렷했다.

“뭐? 월권? 이 새끼가 지금 상무한테…!”

“사규 제4장 감사 규정 제18조. ‘특별 감사는 그 목적과 혐의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대상 부서장에게 24시간 전에 사전 통보해야 한다.’ 상무님은 방금 들이닥치셨죠? 절차 위반입니다.”

구 상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전사 비상사태에 준하는…”

“사전 통보 예외 조항은 ‘횡령’ 및 ‘인명 피해’가 우려될 때만 적용됩니다. 저희가 횡령을 했습니까? 또한, ‘근로기준법 제23조’. 정당한 사유 없는 직무 정지와 사업장 폐쇄는 명백한 부당노동행위로, 지방노동위원회 즉각 고발 대상입니다.”

정 대리는 숨도 쉬지 않고 머릿속에 쌓아둔 수만 장의 법조문과 사규를 랩처럼, 아니 날카로운 붓끝처럼 쏟아냈다.

“지금 저희 팀 서버를 강압적으로 압수하시려는데, ‘영업비밀보호법’ 및 ‘사내 정보보안 가이드라인 3조’에 의거,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코어 소스는 사장의 직접 승인 없이는 감사팀조차 강제 열람이 불가합니다. 황 전무님의 전결 직인만 찍힌 이 공문은, 법적 효력이 없는 휴지 조각입니다.”

완벽했다.

어설픈 억지가 아니라, 회사의 근간을 이루는 완벽한 학문과 규율의 방패.

구 상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술만 파르르 떨었다. 그가 내민 무기는 권력이었지만, 정 대리가 내민 무기는 그 권력을 지탱하는 ‘지혜의 근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이 통제선 수거하시고 퇴각하십시오.”

정 대리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선고했다.

“10분 내로 퇴각하지 않으시면, 이 시간부로 발생하는 프로젝트 지연 손실금 일체와 부당노동행위 고발장을 구 상무님 개인 명의로 법무팀과 노동청에 동시 접수하겠습니다.”

지혜와 학문으로 무장한 선비의 완벽한 사형 선고였다.

구 상무의 등 뒤에서 으르렁거리던 무명의 찌꺼기들이, 옥춘선비의 꼿꼿한 기상 앞에 싹둑 잘려나가며 흩어졌다.

“너, 너희들… 이대로 끝날 줄 알아? 황 전무님이 가만두실 것 같아?!”

구 상무는 붉어진 얼굴로 발악하듯 소리쳤지만, 결국 부하 직원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쿵. 회의실 문이 닫히는 순간.

“와아아아아아!!!”

미래기획팀 팀원들이 일제히 정 대리를 둘러싸고 환호성을 터뜨렸다. 만년 잔소리꾼 서무가, 하루아침에 지혜와 룰로 감사팀 상무를 털어버린 영웅이 된 것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통제선을 발로 툭 차며 피식 웃었다.

황 전무. 당신이 권력으로 찍어 누르려 한다면, 나는 법과 룰을 통달한 선비의 붓으로 당신의 손발을 묶어주지.

장수, 청수, 청림, 부자, 검객, 화광, 암석, 그리고 선비.

8개의 별이 모였다. 이제 이 부서 안에서 우리를 건드릴 수 있는 물리적, 논리적, 법적 수단은 모두 차단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내 휴대폰이 짧은 진동을 울렸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사장 비서실이었다.

[서도진 팀장님. 오후 2시, 사장님 단독 호출입니다.]

황 전무의 꼬리 자르기일까, 아니면 더 거대한 무언가의 시작일까.

나는 서늘해지는 뒷목을 쓸어내리며 회의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