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12 화
무너진 태산에 성벽을 세우다
사무실 중앙에서는 승리의 축배가 터지고 있었지만, 내 신경은 온통 구석 파티션 너머의 오 과장에게 쏠려 있었다.
만년 과장. 후배인 김 대리보다도 발언권이 없고, 회의 때면 늘 투명 인간 취급을 받던 사내. 황 전무의 등에서 떨어져 나온 그 시커먼 무명의 파편은, 오 과장의 그 깊은 자격지심과 소외감을 비료 삼아 그의 정수리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오 과장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모니터에는 권 책임이 방금 서버에 올린 우리 디바이스의 핵심 백도어 소스 코드가 띄워져 있었고, 본체에는 개인용 USB가 꽂혀 있었다. 마우스 커서가 ‘복사(Copy)’ 버튼 위에서 위태롭게 맴돌았다.
황 전무가 심어놓은 프락치일까, 아니면 무명에게 조종당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저 손목을 잡아채고 감사팀에 넘기면 배신자를 처단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할매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무명을 직접 찌르려 들지 마라. 그림자는 쫓아내면 다른 곳으로 스며들 뿐이야.”
내가 오 과장을 해고하면, 저 무명은 또 다른 팀원의 약점을 찾아 기생할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주말마다 등산을 하며 느꼈던 거대한 바위산의 묵직한 호흡을 떠올리며 천천히 그의 자리로 다가갔다.
“오 과장님.”
“히익!” 오 과장이 화들짝 놀라며 마우스를 쥔 손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화면을 가리려 허둥대는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팀장님, 그, 그게. 저는 피자 생각이 없어서 먼저 퇴근을 좀…” 말을 더듬는 그의 등 뒤로, 뱀 같은 그림자가 나를 향해 쉿쉿거리며 적의를 드러냈다.
그 기괴한 어둠을 응시하는 순간, 언제나 그랬듯 뇌리를 관통하는 서늘한 직감과 낯선 단어들이 쏟아져 내렸다.
‘무토(戊土).’
모든 것을 품어내는 거대한 태산(泰山). 본래 그의 기운은 남의 밑에서 잔심부름이나 할 얄팍한 흙먼지가 아니었다. 거센 비바람과 적의 공격을 묵묵히 온몸으로 막아내며, 그 거대한 등 뒤로 수많은 생명을 길러내는 절대적인 방어막.
그것이 바로, 굳건한 성벽의 기운을 타고난 *‘옥춘암석(玉春巖石)‘*의 본질이었다. 하지만 수년간 회사의 냉대와 무시 속에서 방치된 태산은 깎이고 무너져 내려, 그저 발에 채는 초라한 돌멩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이 품어야 할 세상을 잃어버린 산은, 결국 늪이 되어 스스로를 썩히고 있었다.
나는 오 과장의 본체에 꽂힌 USB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 과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듯, 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탁하게 물들어갔다. 무명이 가장 좋아하는 먹음직스러운 절망이었다.
“과장님.” 나는 USB를 뽑아버리는 대신, 상체를 숙여 그의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보고 계셨군요. 방금 권 책임이 올린 코어 소스 코드.”
“팀장님, 이건, 그게 아니라 제가 그냥 훑어만 보려고…”
“다행입니다.” 나는 그의 말을 자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과장님께 부탁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네…?”
나는 오 과장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최 대리가 사방팔방으로 길을 뚫어놓고, 권 책임이 날카로운 코드를 짰습니다. 속도도 좋고 기능도 완벽합니다. 하지만, 너무 가볍고 날카로워서 방어막이 없습니다. 누군가 작정하고 우리 시스템의 심장부를 치고 들어오면 한 방에 무너집니다.”
오 과장의 동공이 미세하게 커졌다. 머리 위의 그림자가 불안한 듯 꿈틀거렸다.
“공격은 저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하반기 런칭까지 살아남으려면, 외부의 어떤 공격과 해킹, 경영진의 트집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무식할 만큼 단단한 성벽이 필요합니다.”
나는 오 과장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묵직하고 단단하게.
“과장님. 남들이 다 앞만 보고 달릴 때, 10년 동안 이 부서의 궂은일과 온갖 잡동사니 데이터를 뒤에서 묵묵히 다 백업하고 관리해 오셨잖습니까.”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엑셀과 씨름하며 팀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세월. 나는 그것을 초라한 잉여 업무가 아니라, 거대한 성벽의 기초 공사로 재정의해 주었다.
“이 프로젝트의 보안 아키텍처 총괄. 과장님이 맡아주십시오. 아무도 우리 시스템에 접근하지 못하게, 과장님이 이 소스 코드를 품고 가장 거대한 문지기가 되어주셔야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오 과장의 정수리를 파먹고 있던 시커먼 진흙 덩어리가 불에 덴 듯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무너져 내렸던 그의 텅 빈 머리 위로, 웅장하고 거대한 흙빛의 아우라가 솟구쳐 올랐다.
자신이 지켜야 할 거대한 성(프로젝트)을 부여받은 태산이, 마침내 본연의 웅장한 위용을 되찾으며 포효하기 시작한 것이다. 압도적인 산의 기운에 짓눌린 무명의 파편은 한 줌의 재가 되어 허공으로 바스러졌다.
오 과장의 눈에 고여 있던 탁한 절망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흔들림 없는 결연함이 자리 잡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쥐었다.
딸깍. 그는 ‘복사’ 버튼이 아니라, ‘포맷(Format)’ 버튼을 눌렀다. 자신의 USB에 담겨 있던 흔적들을 스스로 완벽하게 지워버린 그는, 곧바로 시스템의 최고 보안 권한 설정 창을 띄웠다.
“팀장님… 권 책임이 짠 코드, 빈틈이 너무 많습니다.” 오 과장의 목소리는 더 이상 주눅 든 만년 과장의 것이 아니었다. “이따위로 헐겁게 열어두면 지나가던 개도 해킹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시스템 전체를 이중, 삼중의 암호화 벽으로 다 틀어막겠습니다. 황 전무 할아버지가 와도 제 승인 없이는 소스 코드 한 줄 못 봅니다.”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태산이 되어주십시오.”
나는 오 과장의 등을 든든하게 두드려주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타닥, 타다닥- 거침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너진 돌멩이가 아니라, 프로젝트 전체를 감싸 안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세워지는 소리였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피자 파티가 한창인 중앙 테이블로 걸어갔다. 외부의 적이 던진 절망을 화려한 기술로 받아치고, 내부의 배신자가 될 뻔한 위기를 철통같은 방패로 변환시켰다.
이로써 기획, 데이터, 디자인, 네트워크, 개발, 그리고 보안까지. 프로젝트 NOD를 세상에 내놓기 위한 완벽한 코어 팀, 6명의 별빛이 내 손안에서 완전히 하나로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황 전무가 이대로 얌전히 물러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권력이 살아있는 한, 더 비열하고 거대한 방식으로 우리의 숨통을 조여올 것이다.
‘올 테면 와라. 이제 내 뒤에는, 그 어떤 공격에도 부서지지 않는 성벽이 버티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