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11 화
그림자는 빛을 피해 가장 어두운 곳으로 스며든다
다음 날 오전 9시. 32층 임원 회의실.
“서 팀장. 헬스케어, 결제, 보안. 내가 지시한 세 가지 모듈, 완벽하게 다 탑재해서 왔겠지?” 황 전무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그의 등 뒤에선 어제보다 더 비대해진 시커먼 그림자가 천장까지 촉수를 뻗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저건 불가능한 미션에 좌절했을 우리 팀원들의 기운을 미리 뜯어먹을 생각에 잔뜩 신이 난 포식자의 혓바닥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안주머니에서 얇고 매끈한 블랙 메탈 디바이스를 꺼내 테이블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두께 5mm, 무게 90g. 어제와 똑같은, 텅 빈 껍데기 같은 기기였다.
“팀장님.” 등 뒤에 서 있던 윤 과장(옥춘객주)과 권 책임(옥춘검객)이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눈짓으로 확신을 준 뒤, 디바이스의 전원을 켰다.
삑- 0.1초 만에 시스템이 켜지며 ‘Agentic UX’의 코어 화면이 스크린에 미러링되었다.
“뭐야. 어제 그 텅 빈 기기 그대로잖아!” 황 전무가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내가 어제 분명히 무거운 모듈 다 넣으라고…”
“전무님. 휴대폰 잠금 좀 풀어보시겠습니까?”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담담하게 요구했다. 황 전무는 미간을 구기면서도, 내 당돌한 태도에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최신형 스마트폰 잠금을 해제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풀었어. 그래서 뭐.”
“저희 기기는 모듈을 ‘탑재’하지 않습니다. ‘지배’할 뿐이죠.”
나는 우리 디바이스의 음성 인식 버튼을 눌렀다. “어제 황 전무님이 다녀오신 S병원 건강검진 혈압 데이터 불러와. 그리고 지금 전무님 휴대폰으로 아메리카노 세 잔 결제해.”
“서 팀장, 지금 장난해? 이 기기에는 와이파이도, 블루투스 페어링도 안 되어 있잖아. 그리고 내 폰은 철통같은 보안이…”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황 전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스마트폰 화면이 스스로 번쩍이더니 삼성페이 결제 완료 알림이 떴다. 동시에 대형 스크린에는 S병원의 보안 서버를 뚫고 가져온 황 전무의 ‘고혈압 주의’ 진단 데이터가 완벽한 그래프로 띄워졌다.
“뭐, 뭣…!” 황 전무의 동공이 찢어질 듯 확장되었다. 회의실에 있던 사장과 다른 임원들도 용수철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 어떻게 한 거야? 해킹인가?” 사장이 경악하며 물었다.
“해킹이 아닙니다. 이 기기 안의 Agentic AI 코어가 전무님 스마트폰의 오픈 API와 백도어를 스스로 찾아내어, 권한을 위임받아 ‘대리 수행’을 한 겁니다.”
나는 턱을 치켜들고 황 전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황 전무님 말씀대로, B급 칩셋에 무거운 기능을 다 욱여넣으면 기기는 죽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가벼운 뇌(AI 코어)만 남겼습니다. 이 기기는 반경 10m 안의 모든 스마트 기기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완벽한 ‘마스터 키’입니다.”
최 대리(옥춘화광)가 밤새 뚫어낸 미친 신경망 네트워크와 권 책임(옥춘검객)의 예리한 코딩이 만들어낸 괴물 같은 결과물.
황 전무의 턱이 덜덜 떨렸다. “이, 이건 불법이야! 사내 보안망을 우회하고 남의 폰을 멋대로…”
“상용화 단계에서는 각 회사와 정식으로 API 제휴를 맺으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오늘은 저희 AI 코어가 다른 기기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한 거니까요. 300억의 손실을 막고 하반기 시장을 독식할 증명.”
사장이 내 말을 받아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대단해! 서 팀장.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예산 30%로 이런 미친 효율을 뽑아내다니. 하반기 런칭까지 이 기조 유지해서 무조건 완성해!”
완벽한 승리였다. 그 순간, 내 눈에는 가장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황 전무의 등 뒤에서 오만하게 천장을 찌르던 시커먼 그림자가,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장수의 붉은 깃발, 청수의 푸른 물빛, 청림의 유연한 숲, 부자의 황금 엽전, 검객의 서늘한 칼날, 그리고 화광의 맹렬한 불꽃까지.
우리 팀원들의 6가지 찬란한 별빛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우라에, 그림자의 촉수들이 바싹 타들어 가고 있었다. 무명은 결코 맹렬하게 타오르는 본질의 빛을 이길 수 없었다.
회의실을 나서는 황 전무의 어깨는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와아아아아!!” 미래기획팀 사무실은 축제 분위기였다. 최 대리가 사 온 피자와 맥주가 테이블에 깔렸고, 늘 서로를 탓하던 팀원들이 이제는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내 자리에서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할매의 말대로였다. 내가 절망을 거두어 흙에 묻자, 그들이 스스로 빛을 뿜어내어 괴물을 퇴치했다. 이제 남은 20명의 팀원들만 다 깨워낸다면, 황 전무가 아니라 회장 할아버지가 와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가슴 한구석에서 이유 모를 서늘한 한기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기다려 봐. 아까 회의실에서 황 전무 등 뒤에 있던 그 그림자…’
타들어 가던 무명의 본체는 흩어졌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불에 탄 그림자의 끄트머리, 새까만 진흙 같은 파편 하나가 살기 위해 꿈틀거리며 회의실 문틈으로 도망치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무명은 남의 빛을 파먹어야만 살 수 있는 포식자다. 숙주(황 전무)가 치명상을 입었다면, 생존을 위해 가장 취약하고 빛이 없는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 숨어들었을 것이다.
어디로? 가장 절망이 깊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어두운 곳으로.
내 시선이 축제판을 벌이고 있는 팀원들을 지나, 사무실 가장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파티션에 가려져 평소엔 누가 앉아있는지조차 잘 보이지 않는 자리. 만년 과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후배들에게 진급도 밀린 채 하루 종일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엑셀만 들여다보던 오 과장의 자리였다.
그는 피자 파티에도 끼지 않은 채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 눈에, 똑똑히 보이고 말았다.
오 과장의 정수리 위. 어떤 별빛도 깃들지 않은 텅 빈 공허한 공간에, 황 전무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 시커먼 진흙(무명)의 파편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무명이 오 과장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이듯,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오 과장의 눈동자가 모니터의 불빛을 받아 탁하게 번들거렸다. 그의 모니터 화면에는 방금 전 권 책임이 서버에 올린 우리 디바이스의 ‘핵심 보안 백도어 소스 코드’가 띄워져 있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무명은 밖에서 쳐들어오는 게 아니야. 안에서부터 좀먹어 들어가는 거지.” 어젯밤 할매의 경고가 귓가를 때렸다.
우리 팀의 코드를 빼돌리려는 배신자. 황 전무의 무명은 죽지 않았다. 빛이 너무 강해지자, 가장 빛이 없고 그림자가 짙은 우리 팀 내부의 약한 고리를 찾아 스며든 것이다.
진짜 끔찍한 사내 정치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파멸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