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10 화
불가능이라는 땔감을 던져라, 네트워크의 불꽃이 튈 테니
오전 8시. 미래기획팀 회의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밤새 잠을 설친 팀원들의 창백한 얼굴과, 어제 황 전무가 집어 던졌던 ‘헬스케어, 결제, 보안 모듈 추가 지시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팀장님… 이거 진짜 하실 겁니까?” 소프트웨어를 담당하는 권 책임(옥춘검객)이 피가 마르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기껏 RTOS(실시간 운영체제)로 뼈대만 남겨서 날아다니게 만들어 놨는데, 저 무거운 모듈 세 개를 얹는 순간 우리 기기는 폭발합니다. B급 칩셋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황 전무님이 그걸 노리고 일부러 죽으라고 지시한 거 모릅니까?”
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머리 위에서 어제 황 전무가 뿌리고 간 기분 나쁜 어둠의 잔재들이 들러붙어, 그들의 빛을 질식시키려 하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며, 할매가 말했던 ‘가색(稼穡)‘의 힘을 떠올렸다. 끝을 흙에 묻어 새로운 시작으로 변환시키는 자. 황 전무가 던진 저 불가능이라는 절망을, 나는 오늘 가장 완벽한 땔감으로 쓸 작정이었다.
“다들 오해하고 있네. 황 전무님 지시대로 모듈을 다 넣긴 할 건데,” 나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가 마커를 집어 들었다.
“우리 기기 안에 안 넣을 거야.”
“네? 그게 무슨…”
나는 화이트보드 한가운데에 작고 얇은 디바이스 그림을 그렸다. “우리가 개발 중인 이 폼팩터는 철저하게 가벼워야 해. 센서도, 무거운 앱도 필요 없어. 왜냐?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연산 장치와 수백 개의 센서가 이미 고객들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으니까.”
나는 기기 옆에 스마트폰 그림을 하나 더 그리고, 두 개를 선으로 이었다. “스마트폰. 고객이 이미 쓰고 있는 기존 스마트폰의 자원을, 우리가 만든 ‘Agentic 코어’가 다이렉트로 통제하게 만들 거다. 고객이 결제를 원하면 우리 기기가 스마트폰의 삼성페이 API를 몰래 깨워서 대신 결제하고 결과만 띄워주는 거지. 헬스케어도 스마트워치와 연동된 폰의 데이터를 우리 기기가 읽어오기만 하면 돼.”
회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회의 발견, 코드명 ‘프로젝트 NOD’. 이것이 내가 밤새 구상한, 무거운 하드웨어 경쟁을 피하면서도 AI-Native 생태계를 장악할 ‘진짜 혁신’의 밑그림이었다.
하드웨어와 디자인 팀이 환호성을 지르려던 찰나, 다시 권 책임이 이마를 짚었다. “팀장님. 아이디어는 미쳤는데… 그게 구현이 됩니까? 타사 앱이나 기존 스마트폰 OS의 깊은 곳까지 접근하려면, 비공식 API 백도어를 뚫거나 온갖 회사 시스템들의 네트워크 프로토콜을 우회해서 연결해야 합니다. 거미줄처럼 얽힌 그 복잡한 네트워크 통신망을, 대체 누가 단 며칠 만에 다 뚫고 연결합니까?”
맞는 말이었다. 장수(불도저)나 청수(데이터 분석가), 검객(코드 최적화)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건 세상의 모든 정보를 훔쳐듣고, 가장 빠르고 은밀한 길을 찾아내 점과 점을 잇는 ‘미친 거미’ 같은 인재가 필요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회의실 구석 자리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오늘 아침까지도 사내 메신저 창을 5개나 띄워놓고, 온갖 부서의 가십거리와 뒷담화를 실시간으로 퍼 나르던 인간. 사내 정보망의 허브이자, 업무 시간에 채팅만 치는 ‘월급 루팡 2호’, 최 대리가 앉아 있었다.
“어머, 팀장님. 왜 절 그렇게 보세요?” 최 대리가 뜨끔한 듯 메신저 창을 황급히 내리며 눈웃음을 쳤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그녀의 정수리 위. 가벼운 가십거리를 나를 때마다 탁한 그림자에 짓눌려 픽픽 꺼져가던 ‘타오르는 붉은 불꽃’ 하나가.
그 빛을 응시하는 순간, 내 뇌리 깊은 곳에서 또다시 강렬한 직감이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상관(傷官).’
규칙을 상하게 하고, 틀을 깨부수어 자신만의 기발한 언어와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천재성. 그리고 그 기운이 뻗어 나가는 형태는 다름 아닌 ‘옥춘화광(玉春火光)’. 사방으로 맹렬하게 번져나가며 세상의 모든 끊어진 점들을 연결해 버리는 미친 불꽃의 네트워크였다.
“최 대리. 너, 영업팀 박 과장이랑 인사팀 이 대리 사내 연애하는 거, 블라인드 앱에 올라오기도 전에 제일 먼저 알았지?”
“네? 아, 아니 팀장님. 그건 제가 그냥 눈썰미가 좋아서…”
“보안팀 서버 관리자랑도 친하다며? 사내 망 우회하는 프록시 주소, 네가 우리 부서원들한테 다 뿌렸잖아.” 최 대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널 책망하려는 게 아니야.” 나는 화이트보드의 거미줄처럼 얽힌 네트워크 선들을 가리켰다.
“네가 사내 메신저로 온갖 부서의 정보를 빼내고 연결했던 그 미친 정보력과 백도어 탐색 능력을, 사람 뒷담화하는 데 쓰지 말고 저기다 써보라는 거야.”
최 대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틀에 박힌 업무(관성)에 갇히면 미쳐버리지만,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변칙적인 틈새를 찾아내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
나는 황 전무가 던져준 ‘절망’이라는 땔감을, 이 불꽃을 위해 아낌없이 부어버렸다.
“기존 스마트폰 앱들을 우회해서 통신할 수 있는 오픈 API, 비공식 루트, 시스템 취약점. 네가 가진 그 문어발식 인맥과 변칙적인 검색 능력으로 전부 다 털어 와. 황 전무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디바이스가 폰의 모든 기능을 ‘대리 수행(Agentic)‘할 수 있게 완벽한 네트워크 신경망을 짜버려.”
나의 묵직한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최 대리의 머리 위를 무겁게 덮고 있던 가십과 권태의 그림자가, 마치 휘발유에 불이 붙은 듯 펑! 하고 터져나갔다.
억눌려 있던 옥춘화광(玉春火光)의 붉은 불꽃이 미친 듯이 타오르며 회의실의 어둠을 모조리 태워버리고 있었다. 상관(傷官)의 반항적이고 천재적인 기운이 제 놀이터를 찾은 것이다.
“하.” 늘 가벼워 보이던 최 대리의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 진지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팀장님. 뒷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타사 앱이나 사내 보안망 백도어 건드리는 거, 까딱하면 법무팀에서 날아옵니다.”
“뒤는 내가 다 막는다고 했잖아.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네가 얼마나 징그럽게 연결을 잘하는지 그 미친 짓거리 좀 제대로 보여달라고.”
그녀가 씩 웃으며 노트북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 남의 뒷담화나 치던 그녀의 손가락이, 이제는 전 세계의 오픈 소스와 해커 커뮤니티, 그리고 수많은 개발자 포럼을 미친 듯이 오가며 정보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불과 두 시간 뒤. 최 대리가 권 책임의 모니터 화면으로 방대한 패킷 구조도와 API 우회 연동 프로토콜 지도를 전송했다.
“권 책임님. 삼성페이 우회 결제 모듈, 애플 헬스킷 비공식 연동 루트, 그리고 사내 보안 앱 토큰 탈취해서 우리 기기로 미러링하는 백도어까지. 라우팅 테이블 다 짰어요. 당장 코딩 시작하세요.”
권 책임이 전송받은 네트워크 지도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친… 이걸 두 시간 만에 뚫었다고? 이 루트대로면 우리 기기엔 10MB짜리 통신 모듈 하나만 얹어도 결제고 보안이고 다 터뜨릴 수 있습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폭발했다. 절망의 어둠이 가득했던 공간은, 옥춘화광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와 생명력으로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황 전무의 32층 임원실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한 번 계속 절망을 던져보시지. 당신이 던지는 불가능이 무거울수록, 내 팀원들의 별빛은 더 거칠고 화려하게 터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