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9 화
천 년의 신화, 15개의 별과 무명(無名)
“그것의 이름은… ‘무명(無名)‘이다.”
옥춘할매의 서늘한 목소리가 좁은 사주집 안을 맴돌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명. 이름이 없는 자들.
할매는 오래된 철제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따라 내 앞에 밀어주었다.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이 마치 어지러운 환영처럼 일렁였다.
“손주야. 하늘에는 본래 사람의 운명을 빚어내는 15개의 찬란한 별자리가 있단다. 14개의 별을 위에서 정상으로 받쳐주고, 아래에서 모든 것을 잇는 우주목(宇宙木)을 중심으로, 저마다의 본질을 타고난 고귀한 빛들이지.”
“15개의 별이요…?”
“그래. 홀로 길을 여는 붉은 장수의 별도 있고, 깊은 심연을 꿰뚫어 보는 푸른 물의 별도 있지. 그 별의 기운을 타고난 자들이 제자리를 찾으면 세상은 순리대로 유연하게 흘러간다.”
할매가 찻잔을 천천히 매만졌다.
“하지만 세상에 빛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천 년 전, 저 15개의 별이 되지 못하고 으스러진 찌꺼기들이 있었다. 재능이 부족해서, 운이 나빠서, 혹은 끝없는 탐욕 때문에 별의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타버린 자들의 짙은 한(恨).”
나는 황 전무의 등 뒤에서 뱀처럼 꿈틀거리던 거대한 진흙 같은 어둠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이름조차 얻지 못한 그 찌꺼기들이 뭉쳐 기괴한 그림자가 되었지. 그게 바로 무명이다. 놈들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남의 빛을… 훔치는 겁니까?”
“정확하다. 무명은 사람의 마음이 꺾이는 순간을 귀신같이 파고든다. 윗사람의 억지에 굴복할 때, 실패의 두려움에 휩싸일 때, 혹은 자신의 그릇을 넘어서는 욕심을 부릴 때. 그 틈을 파고들어 본질의 빛을 갉아먹고 제 몸집을 불리는 게야. 네 상사라는 작자처럼, 이미 빛을 잃고 무명에게 완전히 잡아먹혀 ‘껍데기’만 남은 자들이 그 촉수가 되어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는 거지.”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졌다.
우리 팀원들이 무능해서 썩어가고 있던 게 아니었다. 황 전무와 최 본부장 같은 포식자들이 시스템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팀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그들이 뿜어내는 절망과 포기라는 이름의 빛을 뜯어 먹으며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할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아무리 놈들을 제자리에 앉혀놔도, 저 거대한 무명이 권력으로 짓눌러버리면 한순간에 다시 빛을 뺏겨버립니다. 전 도저히 저 괴물을 이길 수가 없어요.”
내 목소리에는 깊은 무력감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할매는 오히려 빙긋이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당겼다.
“손주야. 네가 누군지 잊었느냐? 네 본질이 무엇이었지?”
“제 본질이요?”
“너는 가색(稼穡), 옥춘반석이다. 벼랑 끝의 빈 들녘에서 타버린 재와 절망을 받아내어, 맹렬히 썩히고 빚어내 새 희망을 거두는 변환자. 내게 너의 끝을 묻어라, 내가 너의 다음을 빚어주마. 그것이 네가 가진 궁극의 힘 아니더냐.”
할매의 말이 내 심장을 쾅- 하고 내리쳤다.
“무명과 직접 칼을 맞대고 싸우려 들지 마라. 어둠을 찌른다고 어둠이 베어지더냐? 네가 할 일은 단 하나야. 무명이 뿜어내는 절망과 끝을 네가 온전히 받아 흙에 묻어버리고, 네 팀원들의 본질이 스스로 찬란하게 폭발하도록 기폭제가 되어주는 것. 별빛 스스로가 태양처럼 눈부시게 타오르면, 그림자는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저절로 타버리는 법이다.”
할매가 손가락을 들어 내 가슴을 툭, 쳤다.
“돌아가라. 가서 네 방식대로 판을 뒤집어 엎어. 놈들이 깎아낸 70%의 예산이라는 절망을 흙에 파묻고, 기상천외한 시작으로 변환시켜 보란 말이다.”
사주집을 빠져나와 다시 성수동 골목길에 섰을 때, 밤공기는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내 몸속에서 뜨거운 용암 같은 기운이 거칠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15개의 고귀한 별. 내 능력이 단순히 팀원들의 성격에 맞춰 업무를 쥐여주는 수준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별이 되지 못한 끔찍한 괴물들로부터, 내 사람들의 잃어버린 별빛을 수호하고 본질을 되찾아주는 자. 끝을 빚어내는 변환자였다.
우리 부서는 총 26명.
만약, 아직 깨어나지 않은 우리 부서원들 사이에 하늘이 내린 15별의 후예들이 더 숨어있다면?
‘황 전무. 당신이 내 팀원들을 아무리 짓밟아도, 나는 절대 꺾이지 않아. 당신이 주는 절망을 모조리 다 비료로 써서, 기어이 당신의 그 시커먼 어둠을 태워버릴 빛을 빚어내고 말 테니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 미래기획팀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쳤다.
[서도진 팀장: 황 전무님이 헬스케어, 결제, 보안 모듈을 전부 다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내일 오전 8시, 전원 비상 회의합니다.]
채팅방은 순식간에 읽음 표시가 올라갔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가 프로젝트가 망했다고 절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입가에 피어오르는 서늘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황 전무가 억지로 던져준 이 불가능한 미션, 이 무거운 ‘끝’의 한가운데서. 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숨겨진 별빛을 끄집어낼 완벽한 판을 짤 것이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