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8 화
압도적인 어둠, 그리고 다시 찾은 골목길
삑- 하는 경쾌한 기동음. 단 0.1초. 로딩 화면조차 없이 즉각적으로 시스템이 기동하며, 영롱한 빛을 내뿜는 ‘Agentic UX’의 코어 화면이 대형 스크린에 미러링되었다.
회의실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방금 전까지 “싼 티 나는 칩셋에서 돌아갈 리 없다”며 비아냥거리던 황 전무의 얼굴은,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굳어있었다.
“이게… 방금 부팅이 끝난 건가?” 사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스크린과 디바이스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나는 권 책임이 밤새 깎아낸 예술적인 코드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껍데기뿐인 회사 표준 OS를 완전히 버렸습니다. 오직 유저의 행동을 예측하는 AI 코어 하나만 돌아가게끔 밑바닥부터 새로 짰습니다. 예산은 70% 삭감되었지만, 퍼포먼스는 기존 기기들보다 300% 이상 빠릅니다.”
사장의 눈빛에 맹렬한 탐욕이 일었다. 이대로 하반기에 양산만 성공한다면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승리의 쐐기를 박으려던 찰나였다.
“서 팀장.” 황 전무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내 시야가 시커멓게 일그러졌다. 황 전무의 등 뒤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거대한 진흙 같은 어둠이, 순식간에 회의실 천장까지 부풀어 오르며 사방으로 기괴한 촉수를 뻗어내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힐 듯한 압박감이 목을 조여왔다.
“빠르면 뭐해? 그 안에 들어가야 할 헬스케어, 결제, 보안 모듈은 다 어디 갔어? 기능이 없잖아, 기능이!” 황 전무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건 기존 스마트폰으로 처리하면 됩니다. 이 기기는 철저하게…” “내 말 안 끝났어!”
황 전무의 고함과 함께, 그의 등 뒤에 있던 그림자가 우리 팀원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시커먼 촉수들이 가장 먼저 영업팀을 박살 냈던 김 대리의 붉은 깃발을 칭칭 감아버렸다. 이어서 이 사원의 푸른 물빛을 탁한 진흙으로 덮어버렸고, 권 책임의 서늘한 은빛 칼날 위로 시커먼 녹을 들이부었다.
“이딴 잡동사니를 혁신이랍시고 들고 와? 소비자가 바보인 줄 알아? 300억 손실 막겠다고 아무것도 안 되는 장난감을 팔아? 당장 헬스케어 모듈부터 기존 회사 표준 규격으로 전부 다시 넣어!”
황 전무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철저한 억지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억지가 ‘전무이사’라는 거대한 권력의 탈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장조차 황 전무의 강경한 태도에 멈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전무님. 그걸 다시 넣으면 예산도, 기기 속도도…” “서 팀장. 넌 지금 전사적 비상경영 체제가 장난 같나 보지? 내일까지 모듈 쑤셔 넣어서 다시 가져와. 안 그러면 이 프로젝트 전체 드랍(Drop)시키고, 미래기획팀 해체 안건 이사회에 올릴 테니까.”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어둠에 먹혀 들어가는 팀원들의 별빛이 미친 듯이 깜빡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김 대리의 눈빛에 다시 패배주의가 스며들고 있었고, 이 사원의 어깨가 체념한 듯 늘어졌다. 권 책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주먹을 등 뒤로 숨긴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틀렸다. 사람들의 본질에 맞는 자리를 찾아주고 능력을 끌어내면, 그 빛으로 다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저 시커먼 어둠은 단순히 굳어버린 관습이나 무능이 아니었다.
저것은 악의를 가지고 사람들의 빛을 고의로 집어삼키는, 살아 숨 쉬는 ‘포식자’였다. 나의 어설픈 직감과 직급 따위로는, 저 거대한 어둠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팀원들의 불씨를 살려내자마자 더 큰 절망으로 밀어 넣어버린 꼴이었다.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수정안 보고드리겠습니다.”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날 오후. 사무실은 완전히 초상집이 되어버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기적처럼 타올랐던 4명의 별빛마저 시커먼 어둠에 짓눌려 흔적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시 모든 것이 처음 그 썩어빠진 폐급 수용소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견디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외근 좀 다녀오겠습니다.”
건물을 빠져나와 무작정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는 단 하나였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쏟아지고 있었다. 퇴근 시간의 번잡한 인파를 뚫고, 나는 익숙한 성수동의 후미진 골목길로 정신없이 걸음을 옮겼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쯤, 낡은 건물 틈바구니에서 기묘한 이질감을 풍기며 서 있는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옥춘할매 사주 ]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코끝을 찌르는 묵직한 향냄새가 밀려왔다.
“왔구나.”
어두컴컴한 실내. 남색 한복을 입고 둥근 안경을 쓴 할매가, 마치 내가 올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할매의 책상 앞을 양손으로 짚었다.
“대체… 내 눈에 보이는 그 시커먼 그림자들의 정체가 뭡니까.” 내 목소리는 억울함과 절망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팀원들 빛을 살려놓으면, 그 그림자가 귀신같이 달려들어서 모조리 다 뜯어 먹어버립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이길 수가 없어요. 대체 그 징그러운 어둠의 정체가 뭐냐고요!”
내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도, 할매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느릿하게 안경을 고쳐 쓰더니, 서늘하고 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림자가 아니다, 손주야.”
할매의 눈동자 너머로, 천 년의 세월을 품은 듯한 기괴하고 장엄한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별이 되지 못한 자들의 한이 뭉친 어둠. 꿈과 희망이 약해진 자들의 틈을 파고들어, 타인의 빛을 파먹고 자라나는 진짜 괴물이지.”
할매가 나를 향해 몸을 훅 기울였다. “그것의 이름은… ‘무명(無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