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7 화

무딘 쇠를 벼려, 단 하나의 검을 뽑다

디자인팀과 하드웨어팀이 합작하여 깎아온 목업(Mock-up)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예산 70% 삭감이라는 황 전무의 덫이 오히려 축복이 되었다. 무겁고 조잡한 센서를 싹 뺀 덕분에, 우리 팀의 하드웨어는 종이처럼 얇고 깃털처럼 가벼운 극한의 미니멀리즘 폼팩터로 탄생했다.

하지만, 껍데기가 아무리 예쁘면 뭐 하나. 뇌가 썩어있는데.

“팀장님… 이거 도저히 안 돌아갑니다. 부팅에만 40초가 걸려요.”

수요일 새벽 2시.

우리 팀의 소프트웨어 개발을 담당하는 권 책임이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전원이 켜지다 말고 멈춰버린 시꺼먼 프로토타입 기기가 놓여 있었다.

“회사 표준 안드로이드 OS가 너무 무겁습니다. 예산 맞추느라 B급 저전력 칩셋을 달았더니, 이 무거운 OS를 감당을 못 해요. 억지로 우겨 넣으려니까 메모리 충돌 나고 계속 뻗습니다.”

권 책임은 사내에서 ‘누더기 깁는 장인’으로 통했다. 윗선에서 말도 안 되는 기능을 기획해 오면, 기존 코드에 임시방편으로 덧대고 기워가며 어떻게든 돌아가게만 만드는 유지보수의 노예.

황 전무가 노린 게 바로 이거였다. 예산을 깎아 저사양 칩셋을 쓰게 강제해 놓고, 회사의 무거운 표준 OS를 돌리게 만들어 시스템 부하로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는 것.

“권 책임. 코드 최적화로는 답이 없나?”

“불가능합니다. 코드가 수백만 줄이에요. 이걸 3일 만에 B급 칩셋에 맞춰서 가볍게 뜯어고치는 건, 제 머리를 슈퍼컴퓨터로 바꿔오셔도 안 됩니다.”

체념한 듯 한숨을 쉬는 권 책임의 정수리 위로, 내 시야가 다시 한번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머리 위에는 탁하고 무딘 쇳덩어리 하나가 떠 있었다.

본래라면 시퍼렇게 날이 선 명검(名劍)이어야 할 기운이, 수년간 덧대어진 무거운 레거시(Legacy) 코드와 시커먼 그림자에 짓눌려 벌겋게 녹이 슬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 녹슨 쇳덩어리를 응시하자, 어김없이 서늘하고 날카로운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갔다.

‘종혁(從革).’

따르고 변혁한다는 쇠의 본질. 저 남자는 처음부터 완성된 천재가 아니라, 거친 옥이 다듬어져 보석이 되듯, 무딘 쇠가 뜨거운 불길 속에서 단련되어 날카로운 검이 되듯 스스로를 끝없이 정제하는 수련형의 기운을 타고났다.

그런 ‘옥춘검객(玉春劍客)‘에게 낡고 더러운 누더기나 깁게 만들었으니, 칼날이 녹슬어 죽어갈 수밖에.

“권 책임. 회사 표준 OS 버려.”

내 입에서 튀어나온 단호한 한 마디에, 회의실에 남아있던 팀원들의 고개가 확 돌아갔다.

“네? 표준 OS를 버리면… 기기를 뭘로 돌립니까?”

“RTOS(실시간 운영체제). 제일 가볍고 원초적인 놈으로 올려서, 우리가 기획한 ‘Agentic UX’ 코어 로직만 네가 처음부터 다시 짜.”

권 책임의 입이 떡 벌어졌다.

“팀장님,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OS 커스터마이징부터 앱 구동단까지 생짜로 새로 짜라고요? 금요일 보고인데 3일 남았습니다! 전 그런 엄청난 거 해본 적도 없는 그냥 땜빵 개발자라고요!”

“아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권 책임의 의자를 홱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치게 했다.

“넌 누더기 깁는 재봉사가 아니야.”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서늘한 금(金)의 기운이, 내 목소리를 타고 칼날처럼 뻗어나갔다.

“가장 군더더기 없는 본질만 남기고 깎아내는 정밀함. 그게 네 진짜 무기다. 더러운 코드 덧붙일 생각 하지 말고, 네 손으로 직접 뜨거운 불에 넣어서 완벽한 단 하나의 검을 벼려내.”

그 순간이었다.

권 책임의 머리 위를 짓누르던 시커먼 그림자가, 예리한 칼날에 베인 것처럼 찢겨 나갔다. 동시에 벌겋게 녹슬어 있던 쇳덩어리에서 눈이 부실 만큼 시퍼런 은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군더더기를 쳐내고, 단단하게 정제된 결단의 빛. 스스로를 변혁하는 ‘옥춘검객’의 진정한 각성이었다.

권 책임의 떨리던 눈동자가 일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늘 굽어 있던 그의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그는 말없이 키보드로 손을 뻗더니, 화면에 띄워져 있던 회사의 거대한 표준 OS 소스 코드 폴더를 클릭했다.

그리고 ‘Shift + Delete(영구 삭제)’ 버튼을 망설임 없이 내리찍었다.

수십 기가바이트짜리 무거운 레거시가 허공으로 증발해 버렸다.

“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썩은 살에 반창고 붙여봤자 곪기만 하죠.”

권 책임이 넥타이를 풀어 던지며 모니터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그의 등 뒤로, 서늘하게 벼려진 명검의 환영이 겹쳐 보였다.

“다 잘라내겠습니다. 오직 유저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AI 코어. 딱 그것 하나만 돌아가게, 세상에서 제일 가볍고 단단하게 깎아보겠습니다.”

타닥, 타다닥, 탁!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에러 로그만 토해내던 화면에,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아름다운 코드들이 예술 작품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속의 금요일 오전 9시.

사장과 황 전무, 그리고 주요 임원진이 모인 32층 회의실 탁자 위.

그곳에는 70% 삭감된 예산으로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얇고 유려한, 블랙 메탈 소재의 디바이스가 고요하게 놓여 있었다.

“서 팀장. 껍데기는 그럴싸하게 뽑아왔네.”

황 전무가 팔짱을 낀 채 비웃듯 말했다. “하지만 우리 회사 표준 OS가 저런 싼 티 나는 칩셋에서 돌아갈 리가 없지. 부팅이나 제대로 되나?”

그의 등 뒤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그림자가 뱀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나는 뒤에 서 있는 권 책임을 힐끗 돌아보고는, 피식 웃으며 디바이스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단 0.1초.

로딩 화면조차 없이 즉각적으로 시스템이 기동하며, 영롱한 빛을 내뿜는 ‘Agentic UX’의 코어 화면이 대형 스크린에 미러링되었다.

무거운 군더더기를 완전히 걷어내고 뼈대만 남긴, 옥춘검객의 정제된 칼날이 마침내 세상에 뽑혀 나오는 순간이었다.

황 전무의 여유롭던 표정이 일순간 산산조각 나며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