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6 화
다 가지려다 다 잃는다, 선택과 집중의 튜닝
“어이, 서 팀장. 오늘 발표 제법이던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장실로 직행하는 황 전무가 서 있었다.
그의 사람 좋은 웃음 너머로, 나는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 최 본부장의 등 뒤에 붙어있던 그림자는 애교 수준이었다. 황 전무의 등 뒤로는 거대하고 시커먼 진흙 같은 어둠이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일렁이고 있었다.
“전무님. 감사합니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최 본부장이 싸놓은 똥 치우느라 고생이 많아. 전권을 위임받았으니 기대가 커.”
황 전무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가 뱀처럼 씩 웃으며 덧붙였다.
“아, 참고로 방금 재무팀에 지시해 뒀네. 전사적인 비상경영 체제라 신규 프로젝트 예산은 기존의 30%만 배정하기로 했어. 서 팀장 능력이라면 그 돈으로도 충분히 ‘혁신’을 만들 수 있겠지?”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로, 황 전무 등 뒤의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조롱하듯 출렁였다.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예산 70% 삭감. 최 본부장을 쳐냈더니, 그 윗선에 도사리고 있던 더 거대한 카르텔이 내 목줄을 끊어버리려 움직인 것이다. 기획을 통과시키면 뭐 하나. 하드웨어 프로토타입을 만들 돈이 없는데. 그림자에게 완전히 잡아먹힌 자들은, 이렇게 시스템의 권력을 이용해 사람의 희망을 말려 죽이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 10시.
미래기획팀 회의실.
어제 박 차장의 처절한 굽힘(조율) 덕분에 하드웨어팀 김 수석과 디자인팀 파트장이 마주 앉았지만, 회의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예산이 30% 토막 났는데 어떻게 프로토타입을 뽑습니까? 센서 값도 안 나와요.”
하드웨어팀 김 수석이 짜증스럽게 볼펜을 던졌다.
우리 팀에서 디바이스 기획을 담당하는 윤 과장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PPT 화면을 넘겼다.
“그래서 제가 밤새 단가를 좀 맞춰봤습니다. A급 칩셋 대신 B급을 쓰고, 외관 소재를 플라스틱으로 낮추면… 그래도 우리가 기획한 심박수 측정, 홍채 인식, AR 프로젝션 기능까지 다 넣을 수 있습니다!”
화면에 뜬 기획안은 그야말로 끔찍한 혼종이었다.
예산은 없는데 유행한다는 기능은 죄다 쑤셔 넣으려다 보니, 혁신적인 기기가 아니라 중국산 짝퉁 장난감 같은 스펙이 되어버렸다.
“윤 과장. 장난해? 저딴 싸구려 부품으로 디자인이 예쁘게 빠질 거 같아? 당장 디자인팀 철수시킬 거야!”
디자인팀 파트장이 책상을 쾅 치며 일어섰다.
사면초가.
윤 과장은 이쪽저쪽의 눈치를 보며 “아니, 그래도 하나라도 빼면 마케팅팀에서 팔 포인트가 없다고 난리 칠 텐데…” 하며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시야가 다시 한번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윤 과장의 정수리 위.
원래라면 밝게 빛났어야 할 황금빛 엽전 모양의 기운이 보였다. 하지만 그 황금빛 위로, 허상처럼 부풀려진 수십 개의 가짜 금화(그림자)들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수많은 금화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헐떡이는 황금빛 본질.
그 광경을 응시하자, 어김없이 낯설고 날카로운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재다신약(財多身弱).’
사주에 재물(기회)은 많은데, 자신(일간)의 힘이 약해 그 무거운 재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구조. 저 남자는 기회를 포착하는 재능이 뛰어나지만,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모든 기능을 다 쥐고 가려다 스스로 기획의 무게에 짓눌려 죽어가는 중이었다.
어젯밤 할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겹쳤다. ‘옥춘객주(玉春客主)’. 재물이 많고 신약한 자에게 진짜 부자가 되는 길은, 욕심을 버리고 단 하나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크린 앞으로 걸어갔다.
“윤 과장. 마우스 줘 봐.”
나는 마우스를 뺏어 들고, 화면에 나열된 수십 개의 화려한 부가 기능들을 가차 없이 삭제(Delete)하기 시작했다.
심박수 측정, 삭제.
AR 프로젝션, 삭제.
홍채 인식, 삭제.
“티, 팀장님! 무슨 짓이십니까! 그거 빼면 우리 기기엔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윤 과장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이딴 싸구려 잡동사니 기능 100개 붙여봤자 아무도 안 사.”
나는 마침내 화면에 단 하나의 핵심 기능, ‘Agentic UX 코어’ 하나만 남겨두고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어제 우리가 증명했잖아. 고객은 조잡한 기능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알아서 읽어주는 단 하나의 완벽한 흐름을 원해.”
나는 당황한 윤 과장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고,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 머릿속에 꽂힌 진실을 묵직하게 내뱉었다.
“하나에 집중해. 다 가지려다 다 잃는다.”
그 말이 윤 과장의 고막을 때린 순간.
그의 정수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수십 개의 가짜 금화(그림자)들이 와장창 깨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무거운 짐을 덜어낸 그의 진짜 별, 단단하고 찬란한 ‘황금빛 엽전’ 하나가 미친 듯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진짜 그릇을 깨닫고, 덜어냄으로써 비로소 부를 거머쥐는 자의 각성이었다.
윤 과장의 동공에 서려 있던 불안감이 싹 가시고, 무언가를 꿰뚫어 본 듯한 맑은 광채가 돌았다. 그는 키보드를 끌어당기더니 미친 듯이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맞아… 맞습니다. 잡다한 센서를 다 빼면 전력 소모가 극단적으로 줄어듭니다. 배터리 용량을 절반으로 줄여도 돼요!”
윤 과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김 수석님! 센서랑 배터리 다이어트하면 내부 공간 얼마나 남습니까?”
하드웨어팀 김 수석이 홀린 듯 화면을 보며 대답했다.
“공간? 텅텅 비지. 그 정도면 업계 최소형 폼팩터로 뽑을 수 있어.”
“파트장님! 이 사이즈면 메탈 소재 풀로 감아도 예산 30% 안에 무조건 들어옵니다. 무겁고 조잡한 기능 싹 뺀, 세상에서 제일 얇고 가벼운 AI 하드웨어. 디자인 뽑으실 수 있겠습니까?”
디자인팀 파트장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장난해? 그 공간이면 내가 아트(Art)를 만들어주지. 당장 목업(Mock-up) 깎으러 간다.”
회의실의 공기가 폭발적으로 끓어올랐다. 불가능해 보였던 70% 예산 삭감의 장벽을, 기능의 99%를 과감히 버리고 단 1%의 본질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옥춘객주’의 결단력이 단숨에 박살 내 버린 것이다.
나는 뜨겁게 돌아가는 회의실 한가운데 서서, 헛웃음을 삼켰다.
황 전무. 당신이 내 예산을 잘라내며 우리 팀을 굶겨 죽이려 했겠지만. 오히려 그 결핍 덕분에 우리 팀의 ‘욕심 많은 기획자’가 가장 치명적인 ‘선택과 집중의 부자’로 각성해 버렸다.
당신의 시커먼 그림자가 아무리 거대해도, 제자리를 찾은 15개의 별빛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안주머니에서 낡은 사직서가 완전히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