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5 화
부러지지 않는 나무는 숲을 만들지 못한다
대회의실을 빠져나와 32층 복도를 걷는 내내, 내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미래기획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평소라면 조용히 마우스 클릭 소리만 났을 공간이 기묘한 정적으로 휩싸여 있었다.
사내 메신저는 벌써 한바탕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서도진 팀장이 최 본부장 모가지를 날리고 신규 프로젝트 전권을 따냈다’는 소문은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내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치자마자, 파티션 너머로 눈치를 보던 24명의 팀원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 가운데, 김 대리와 이지윤 사원만이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김 대리의 머리 위에는 야생의 장수처럼 붉은 기운이 당당하게 펄럭이고 있었고, 이 사원의 정수리에는 깊고 푸른 물빛이 잔잔하게 사무실의 공기를 식혀주고 있었다.
“다들 하던 일 해. 내일 오전 10시에 전체 회의 할 테니까.”
덤덤하게 내뱉고 자리에 앉았지만, 내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 깨어난, 끝을 받아내어 시작으로 빚어내는 변환의 힘. 어젯밤 성수동의 그 할매가 내게 불어넣은 황금빛 기운이 진짜로 내 현실을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승리의 달콤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오후 3시. 대표이사 비서실에서 다이렉트로 메일이 꽂혔다.
[수신: 서도진 팀장. 차주 금요일까지 Agentic UX 기반 하드웨어 프로토타입 개발을 위한 타 부서 연계(디자인/하드웨어 개발팀) 실무 기획안 제출 요망.]
다음 주 금요일? 일주일도 안 남았다. 게다가 디자인팀과 하드웨어 개발팀을 엮어오라니.
우리 회사의 부서 이기주의는 상상을 초월한다. 타 부서 업무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치려 하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통에, 크로스오버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좌초되기 일쑤였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파트장인 박 차장을 불렀다.
“박 차장님. 방금 대표님 지시 내려온 거 보셨죠. 하드웨어 개발팀이랑 디자인팀 실무진 당장 내일 소집해서 킥오프 회의 잡으세요.”
내 말에 박 차장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건 타 부서 소관이라 우리가 먼저 나설 수 없습니다. 규정상 그래요”라며 로봇처럼 선을 그었던 인간이다.
“팀장님. 아무리 전권을 위임받으셨다 해도 이건 무리입니다. 하드웨어 개발팀 김 수석, 그 양반이 우리 팀 기획이라면 쳐다보지도 않는 거 아시잖습니까. 디자인팀도 지금 자기들 고유 업무로 바쁘다고 철벽 칠 게 뻔합니다. 제가 가서 회의하자고 해봤자 문전박대당합니다.”
그는 이번에도 ‘안 되는 이유’부터 기계적으로 나열했다. 부딪혀보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자신을 안전한 규정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굳어버린 태도.
답답함에 한숨을 쉬려던 찰나, 내 눈앞의 시야가 다시 한번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박 차장의 꼿꼿한 정수리 위.
거기에 푸릇푸릇해야 할 어린 나뭇가지 하나가, 시커먼 시멘트 덩어리 같은 그림자에 짓눌려 바싹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저건 또 뭐지?
그 굳어버린 초록빛을 응시하는 순간, 내 뇌리에 어김없이 낯선 단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내가 평생 써본 적도 없는 명리학의 개념들이, 마치 내 숨결처럼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곡직(曲直).’
굽고 곧게 뻗는 본성. 저 남자는 본래 꽉 막힌 벽이 아니라, 막힌 흐름 한가운데서 가장 먼저 허리를 굽혀 흙의 떨림을 듣고, 정확한 때에 가장 먼저 일어서서 숲을 이끄는 ‘조율자’였다.
‘옥춘청림(玉春靑林).’
부러지지 않기 위해서 굽히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듣지 못하는 흐름을 듣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조율하는 자. 그 유연한 덩굴 같은 기운을 가진 사람이, 회사 생활의 상처와 부서 간의 알력 다툼에 지쳐 스스로를 뻣뻣한 나무토막으로 굳혀버린 것이다.
“하아… 내 머리지만 진짜 적응 안 되네.”
나는 미간을 짚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젯밤 할매가 내게 남긴 이 기적 같은 직감이 가리키는 방향은 너무나 명확했다. 저 시커먼 그림자를 걷어내려면, 그가 스스로 허리를 굽히게 만들어야 한다.
“박 차장님.”
나는 박 차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규정, 부서 롤(R&R), 자존심. 다 버리세요.”
“네?”
“하드웨어팀 김 수석이 문전박대하면, 복도에 서서라도 그 양반 불만을 다 들으세요. 디자인팀이 철벽 치면, 그 팀 막내 사원한테라도 가서 요즘 무슨 업무 때문에 야근하는지 물어보시고요.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쪽 팀이 어디가 꽉 막혀있는지 ‘듣고’ 오시란 말입니다.”
박 차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팀장님. 저보고 지금 다른 부서 가서 굽실거리라는 말씀이십니까? 제 연차가 몇 년인데…”
“차장님.”
나는 상체를 훅 당겨 앉으며,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 그 낯설고 단단한 진실을 그대로 입술 밖으로 내뱉었다.
“부러지지 않으려고 뻣뻣하게 서 있는 나무는, 절대 숲을 만들지 못합니다. 굽히는 건 지는 게 아니라, 막힌 흐름을 뚫기 위해 바람의 결을 읽는 겁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박 차장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동시에 그의 머리 위를 짓누르고 있던 시멘트 같은 그림자가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갈라진 틈 사이로, 바싹 말라 있던 초록빛이 파르르 떨리며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는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 번, 아니, 뚫릴 때까지 부딪혀 보겠습니다.”
그가 회의실을 나간 후, 나는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입 밖으로 내뱉고도 믿기지 않았다. 굽히는 건 흐름을 읽기 위함이라는 저런 통찰력 넘치는 말이 어떻게 내 입에서 나왔을까. 확실한 건, 내 눈에 보이는 저 빛깔들과 머릿속의 직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람의 닫힌 숨통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날 오후.
박 차장은 자리에 없었다. 영업팀 문을 부수고 들어갔던 김 대리와 달리, 박 차장은 종일 커피 두 잔을 양손에 든 채 하드웨어팀과 디자인팀 주위를 배회했다.
오후 5시쯤,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박 차장이었다.
[박 차장: 팀장님. 하드웨어팀 김 수석님이랑 디자인팀 파트장, 내일 오전 10시 킥오프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디자인팀이 하드웨어 규격 때문에 막혀있던 이슈를, 하드웨어팀 쪽에서 양보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았습니다.]
놀라운 결과였다. 절대 한자리에 모이지 않던 앙숙들을, 하루 만에 한 테이블에 앉힌 것이다.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가 그들의 막힌 숨통을 정확히 조율해 낸 ‘옥춘청림’의 힘이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회의실을 잡고 있는 박 차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로는 이제 뻣뻣한 나무가 아니라, 유연하지만 거침없이 뻗어 나가는 푸른 숲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야생의 장수가 데이터를 뚫어오고,
깊은 청수가 그것을 심연의 지혜로 해독하며,
조율자 청림이 타 부서의 얽힌 흐름을 풀어내어 숲을 만든다.
어벤져스가 따로 없었다. 내 가슴이 벅찬 희열로 뛰기 시작했다.
이 능력만 있다면, 우리 부서 26명 모두를 깨워 이 회사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웃음은 퇴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다.
“어이, 서 팀장. 오늘 발표, 제법이던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장실로 직행하는 전무이사가 서 있었다.
그의 웃는 얼굴 너머로,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오늘 아침 임원 회의실에서 최 본부장의 등 뒤에 붙어있던 시커먼 그림자.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끔찍한 진흙 덩어리가, 전무이사의 등 뒤에서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회사 전체의 공기를 집어삼킬 듯 일렁이고 있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싸움, 이제 겨우 튜토리얼이 끝났을 뿐이라는 직감이 본능적으로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