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4 화
타버린 재를 심어, 완벽한 칼을 뽑아 들다
오전 9시. 본사 32층 대회의실.
임원진 회의 특유의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최 본부장이 내 쪽을 힐끗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미래기획팀 서 팀장. 어제 내가 지시한 ‘신규 디바이스 트렌드 기획안’ 새로 가져왔겠지? 대표님 앞에서 깔끔하게 보고해 봐.”
회의실 상석에는 사장과 전무급 임원들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주머니 속 USB를 매만지며, 어제 저녁 막내 이지윤 사원이 이 데이터를 완벽하게 해독해 냈을 때 내 머릿속을 강타했던 단어들을 떠올렸다.
‘옥춘청수(玉春淸水).’
깊고 푸른 물빛의 심연. 보이지 않는 밑바닥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지혜의 샘. 김 대리가 닫힌 문을 때려 부쉈을 때 머릿속을 스쳤던 *‘옥춘장수(玉春將帥)‘*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이 사원의 분석을 보았을 때 내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던 이름이었다.
성수동의 그 할매가 내게 준 것은 단순한 직감이 아니었다. 사람의 정수리 위에 깃든 고유한 ‘별의 이름’과 그 본질을 꿰뚫어 보는, 말도 안 되는 기적이었다.
나는 노트북을 연결하고, 화면을 띄웠다.
대형 스크린에 뜬 첫 장의 타이틀.
[ 차세대 AI-Native 하드웨어 : Agentic UX를 통한 이탈률 제로(0)화 전략 ]
화면을 본 최 본부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서 팀장! 너 지금 장난해? 내가 어제 분명히 그 쓰레기 같은 아이템은 폐기하고, 당장 돈 되는 트렌드 UI로 다시 짜 오라고…”
“본부장님.”
나는 그의 말을 단칼에 자르고 마이크를 쥐었다.
“본부장님이 말씀하신 그 ‘돈 되는 트렌드 UI’를 적용할 경우, 우리 회사는 정확히 6개월 뒤 신사업 파트에서 300억 원 규모의 손실을 보게 됩니다. 이 기획안은 그걸 막기 위한 유일한 생명줄입니다.”
회의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팔짱을 끼고 있던 사장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300억 손실? 서 팀장,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프리젠터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어제 막내 이 사원이 파고들어 해독해 낸, 소름 돋도록 완벽한 데이터 분석 그래프가 떠올랐다.
“영업팀에서 어제 오후 5시 30분에 수령한 최신 로우 데이터(Raw Data)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클릭률은 본부장님 말씀대로 상승 곡선입니다. 하지만,”
나는 화면의 붉은 점들을 레이저 포인터로 가리켰다.
“표면 아래의 진짜 이탈 경로를 추적해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유입된 고객의 78%가 세 번째 뎁스(Depth)에서 앱을 완전히 종료해 버립니다. 화려한 껍데기에 속아 들어왔다가 알맹이가 없어 등을 돌리는 겁니다. 이 흐름을 방치하면 하반기 신규 유입은 제로(0)에 수렴합니다.”
사장과 임원들의 몸이 스크린 쪽으로 확 쏠렸다. 누구도 보지 못했던 날것의 팩트였다.
최 본부장이 당황하며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아니, 저격성 데이터 조작 아닙니까? 저런 핵심 데이터를 영업팀에서 순순히 넘겨줬을 리가…!”
“어제 저희 팀 김 대리가 영업팀 차장님과 독대하여 합법적이고 투명하게 수령한 자료입니다.”
나는 최 본부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못을 박았다.
“그럼 대안은 뭔가?”
사장의 묵직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본부장님이 어제 쓰레기통에 버리셨던 이 기획, ‘Agentic UX’입니다.”
나는 다음 슬라이드를 넘겼다.
“고객이 이탈하려는 정확한 그 지점에서, 기기가 알아서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 움직여 줍니다. 고객의 불편을 원천 차단하는 이 기술만이 300억의 손실을 1,000억의 영업 이익으로 뒤집을 수 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가는 동안, 내 시야에 묘한 광경이 겹쳐 보였다.
최 본부장의 등 뒤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던 시커먼 그림자. 어제 우리 팀원들의 붉은 빛과 푸른 빛의 목을 조르려 했던 그 기괴하고 탁한 어둠이,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줄어들고 있었다.
반면, 내 가슴 속에서는 거대한 황금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타버린 재, 남들이 망쳤다고 버린 끝을 받아 깊이 묻고 맹렬히 썩혀, 결국 새로운 시작의 씨앗으로 빚어내는 힘. 어제 내 얼굴에 날아들었던 버려진 기획안(끝)이, 오늘 사장의 눈앞에서 회사의 명운을 가를 완벽한 무기(시작)로 변환되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완벽하군.”
정확히 15분의 발표가 끝났을 때, 사장이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 팀장. 이 분석을 누가 했다고? 미래기획팀 데이터가 이렇게 정교하고 날카로웠나?”
“저희 팀원들의 땀방울이 모인 결과입니다. 저는 그저, 그들이 제일 잘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아주었을 뿐입니다.”
최 본부장의 안색은 이제 잿빛을 넘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 대, 대표님. 사실 이 기획은 제가 서 팀장에게 챌린지를 주기 위해 일부러 강하게 밀어붙여 본…”
“최 본부장은 입 다물어.”
사장의 얼음장 같은 호령이 회의실을 얼어붙게 했다.
“회사의 명운이 걸린 데이터를 눈앞에 두고도 알맹이 없는 헛소리만 늘어놓다니. 서 팀장, 이 신규 디바이스 프로젝트, 오늘부로 미래기획팀에서 전권을 가지고 다이렉트로 내게 보고해. 최 본부장은 이 건에서 손 떼고.”
게임은 끝났다.
최 본부장의 등 뒤에서 허덕이던 시커먼 그림자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듯 쪼그라들더니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회의실 문을 열고 복도로 걸어 나오며,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주먹을 꽉 쥔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배어 있었다.
어젯밤의 사직서, 오늘 아침 김 대리의 각성, 이지윤 사원의 심연.
이 미친 24시간의 롤러코스터가 내게 완벽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미래기획팀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하나 남겼다.
[서도진 팀장: 기획안 통과. 전권 위임받았습니다. 김 대리, 이 사원. 고생 많았어.]
메시지를 보내고 복도 창밖을 내다보는 내 입가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첫 번째 튜닝은 완벽했다. 단 두 명의 별빛을 제자리에 놓은 것만으로도 막강한 본부장 하나를 날려버렸다.
우리 부서의 남은 인원은 아직 24명이나 더 있다.
비록 지금은 사무실 구석에서 엎드려 자고, 딴짓하고, 규정만 읊어대는 월급 빌런들이지만. 내 눈이 꿰뚫어 본 저들의 정수리 위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눈부신 잠재력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또 누구의 별을 깨워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