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2 화

월급 루팡에게 칼을 쥐여주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마자, 맞은편에 앉은 김 대리의 입에서 핑계가 자동 반사처럼 튀어나왔다.

“팀장님, 그 AI 업체 미팅 건 말인데요. 영업팀에서 데이터를 안 넘겨줘서 제가 지금 진행을 못 하고 있습니다.”

남 탓, 부서 탓. 하지만 내 눈엔 그의 정수리 위에서 헐떡이는 붉은 빛이 또렷하게 보였다. 진흙 같은 그림자에 짓눌려 꺼져가고 있지만,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 직감은 계속해서 나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저 놈은 책상머리에 숨는 놈이 아니라 장수(將帥)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나는 테이블 위로 ‘신규 프로젝트 기획안’을 소리 나게 던졌다. “김 대리. 오늘부로 자네가 ‘미래 AI TF’의 실무 대표를 맡아.”

김 대리의 초점 없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제가요? 이건 우리 부서 명운이 걸린 핵심 프로젝트잖습니까. 당장 영업팀 차장님부터 제 말은 듣지도 않을 텐데…”

“말을 안 들으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끌고 와.” “예…?” “데이터를 안 주면 영업팀장 책상을 엎어버려. 남 핑계 대면서 책상머리에 숨지 말고, 자네가 직접 뚫고 나가란 말이야.”

“아니, 팀장님. 제가 직급이…”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김 대리를 향해, 나는 상체를 훅 숙였다. 그리고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낯선 목소리가, 마치 어젯밤의 할매가 빙의라도 한 것처럼 내 입을 뚫고 묵직하게 흘러나왔다.

“네 길은 네가 여는 거다. 누구도 대신 안 해줘.”

그 순간이었다. 김 대리의 정수리를 옥죄고 있던 시커먼 그림자가 불에 덴 듯 흠칫거리더니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붉은 빛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짓눌려 있던 야생의 에너지가 짙은 그림자를 찌르듯이 밀어내는 것이 내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뒤는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앞장서서 막힌 길 다 썰어버려.”

긴 침묵이 흘렀다. 늘 풀려있던 김 대리의 눈빛에, 처음으로 서늘한 짐승 같은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김 대리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의 기획안을 거칠게 집어 들고 회의실을 나섰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뒤. 복도 건너편 영업팀 쪽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김 대리! 자네 미쳤어? 내가 지금 바빠서 데이터 못 뽑아준다고 아침부터 말했잖아!” 영업팀 차장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영업팀 한가운데 서 있는 김 대리의 등 뒤엔, 내 눈에만 보이는 거칠고 붉은 아우라가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김 대리가 영업팀 차장의 책상 위로 사내 규정집을 소리 나게 내려쳤다. 쾅-! “차장님. 전사 핵심 프로젝트 협조 지시, 사장님 명의로 일주일 전에 공문 내려왔습니다. 오늘 18시까지 로우 데이터 안 넘겨주시면, 프로젝트 고의 지연으로 감사실에 올리겠습니다.”

“뭐, 뭣? 대리 주제에 협박을…!” “협박이 아니라 통보입니다. 못 주실 거면 사유서에 지금 당장 서명하십시오.”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강한 의지로 자신의 길을 박살 내며 여는 자. 독선적일 만큼 거칠지만, 꽉 막힌 적진에 던져놓으면 혼자서라도 성벽을 부수고 길을 여는 1인 군대.

머릿속을 맴돌던 ‘비겁다왕(比劫多旺)‘이라는 뜻 모를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앞의 광경이 똑똑히 증명하고 있었다. 내 직감, 아니 내 눈에 보이는 이 환영들은 단순한 스트레스성 망상이 아니었다.

그날 오후 5시 30분. 영업팀 막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우리 부서로 뛰어와 USB를 바치듯 건네고 돌아갔다.

김 대리가 내 책상 앞으로 다가와 USB를 툭 내려놓았다. “팀장님. 데이터 털어왔습니다. 다음은 어딜 부수러 갈까요?”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었지만, 이 미친 상황을 조금 더 밀어붙여 보기로 했다. 나는 조용히 시선을 돌려, 퇴근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팀의 ‘소심한 막내’를 바라보았다.

장수가 거칠게 물어온 이 방대한 데이터를 해독하려면, 머릿속에서 또다시 경고음을 울리고 있는 저 낯선 빛… 막내의 머리 위에 찰랑거리는 ‘깊고 푸른 물빛’의 정체를 확인해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