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사내 암투와 튜토리얼

제 1 화

쓰레기통이 된 부서, 내 머릿속의 이상한 목소리

오전 10시 30분.

미래기획팀 사무실 안에는 식어빠진 믹스 커피 냄새와 숨 막히는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내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김 대리는, 탕비실 구석에 박혀 주식 창을 보며 실실 쪼갠 지 정확히 40분째였다.

내 안주머니에는 일주일째 만지작거려 끄트머리가 다 닳아버린 사직서가 들어 있었다. ‘저 인간을 어떻게 합법적으로 쫓아낼 수 있을까.’ 속으로 수백 번쯤 인사위원회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내 눈앞에, 어제부터 자꾸만 이상한 환영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김 대리의 정수리 위. 거기에 거칠고 붉은 불빛 같은 것이 위태롭게 떠 있었다.

아니, 떠 있다기보다는 가라앉고 있었다. 본래라면 맹렬하게 타올랐어야 할 붉은 빛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겁고 탁한 진흙 같은 그림자에 먹혀 금방이라도 꺼질 듯 헐떡이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드디어 내 뇌가 파업을 선언한 건가.’

홀린 듯 그 꺼져가는 빛을 바라보던 내 머릿속으로, 기어이 어젯밤의 기묘했던 기억이 밀려들었다.

어젯밤. 또다시 기획안이 반려되고 파김치가 되어 걷던 성수동의 후미진 골목.

술기운이었는지 아니면 무언가에 이끌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빌딩 숲 사이에서 ‘옥춘할매 사주’라는 낡은 간판이 불쑥 나타났다.

홀린 듯 밀고 들어간 그곳에는, 깊은 남색 한복에 둥근 안경을 쓴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할매는 쭈뼛거리며 들어선 나를 보더니, 내 안주머니에 든 사직서의 존재라도 아는 것처럼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손주야, 끝의 자리에 섰구나. 타버린 재를 쥐고 무얼 하려느냐.”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내가 경력의 벼랑 끝에 섰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놀란 내 두 눈에, 할매의 옷깃에 둥글게 박혀있던 황금 자수에서 맹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내게 너의 끝을 묻어라. 내가 너의 다음을 빚어주마.

그 말과 함께 내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가 거칠게 요동치며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가색지성(稼穡之性).’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도 모를 생소한 사주 용어 하나가 머릿속에 불쑥 떠오르더니, 그 뜻이 마치 내 원래 생각이었던 것처럼 또렷하게 뇌리에 박혔다. 만물의 끝을 흙에 묻어, 새로운 시작의 씨앗으로 변환시키는 자리. 그게 지금의 내 상태라고?

어젯밤 내 가슴을 강타했던 그 황금빛의 잔상이 아직도 두 눈에 남아, 남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저 이상한 별빛을 보여주는 걸까.

사무실의 공기는 무겁다 못해 썩어가고 있었다.

우리 부서는 총 26명. 겉보기엔 그럴싸한 테크 기획 부서지만, 실상은 사내 정치에서 밀려난 자들이 모인 폐급 수용소다.

“팀장님, 저 오늘 네일아트 예약이 있어서 야근 못 하는데요?”

프로젝트 마감일이 코앞인데 막내 직원은 해맑게 립스틱을 고쳐 바른다.

“팀장님. 그건 영업팀 소관이라 우리가 먼저 나설 수 없습니다. 규정상 그래요.”

파트장이라는 인간은 로봇처럼 규정만 읊으며 선부터 긋는다.

이 꼴을 보고 있자니, 오늘 아침 임원 회의에서 최 본부장이 내 얼굴에 던졌던 서류철의 감촉이 다시금 생생해졌다.

“서 팀장. 기기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Agentic UX? AI-native 하드웨어? 이딴 뜬구름 잡는 소리 당장 갈아엎고 내일까지 새로 가져와!”

그는 우리 팀이 피땀 흘려 분석한 혁신적인 미래 디바이스 콘셉트를 몽상 취급하며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번 프로젝트마저 엎어지면 팀은 공중분해 되고 전원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런데도 이 월급 빌런들은 위기감조차 없이 늪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다시 탕비실 쪽에 시선을 던졌다. 김 대리 머리 위의 꺼져가는 붉은 빛.

그 빛을 가만히 응시하자, 어젯밤처럼 또다시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겁(比劫).’

사주를 공부한 적도 없는데, 그 단어의 의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무리를 짓지 않고 강한 의지로 홀로 길을 여는 자. 저 자식은 책상머리에 얌전히 가둬둘 놈이 아니라, 혼자만의 전장에 던져놓고 제멋대로 칼을 휘두르게 둬야 할 야생의 짐승이다.

이 직감이 대체 어디서 온 건지 나조차 황당했지만, 내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안주머니의 사직서를 도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끝을 받아내어 새로운 시작으로 빚어내는 게 내게 생긴 빌어먹을 능력이라면, 한 번 시험해 볼 가치는 있었다.

“김 대리. 노트북 들고 회의실로 좀 들어오지.”

미쳐버린 팀장의 첫 번째 베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